Trash and Vaudeville

1970년대 중반 킹스 로드가 런던 펑크열풍의 탄생지였다면 뉴욕은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가 그러했다. 꿈꾸는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던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 거리는 평범한 삶을 거부하던 당시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화와도 같은 곳이었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 바바토스 매장과 대중적인 브랜드 체인점들이 펑크의 집결지던 CBGB 클럽 인근을 장악하면서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에 집중되던 인기가 뉴욕다운타운 쪽으로 확산되었지만. 유쾌하지 않은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트래시 앤 보드빌숍만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 거리의 거친 펑크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트래시 앤 보드빌 숍은 1972년 뉴욕이 아닌 뉴저지의 저지시티에서 시작됐지만 사정상 6개월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오너인 레이 굿맨은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 4번지에 위치한 선구적인 히피 부티크 ‘림보’를 인수했고, 레오퍼드 프린트, 레더, 스터드, 슈퍼 스키니진, 찢어진 티셔츠 그리고 닥터마틴으로 가득 찬 지금의 트래시 앤 보드빌 숍으로 변신시켰다. 이 숍은 펑크의 불씨가 꺼져간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곳이기도 했다.


“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이 빈털터리 상태로 버스에서 내렸을 때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는데 지상낙원이 떠올랐어요. 매장 안과 밖에는 펑크를 사랑하는 유명 록스타들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게이, 창녀들이 함께 어울려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죠. 그 순간 누구나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숍 매니저 지미 웹은 이야기한다. 지미 웹은 트래시 앤 보드빌 숍의 위대함을 몸소 느낀 대표적인 사람일 거다. 숍 오너인 레이 굿맨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그는 1999년까지 노숙 생활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거릴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는 펑크 록의 전설로 불리는 이기 팝 음악이 자신을 살렸다고 이야기한다. “이기 팝의 음악은 시궁창에 있던 나를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었어요. 그의 음악과 나 사이에는 정신적인 연결 고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난 주변 사람들에게 마약쟁이로,리는 게 아니라 당당히 지미라 불리고 싶었고, 근사한 바지를 갖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점차 일이 하고 싶어지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고 싶더라고요. ‘만약 당신이 산다면 그것은 펑크 록 때문이고,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문화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펑크 록 정신을 항상 기억하며 살고 있어요.” 14년이 지나도록 그는 여전히 트래시 앤호가하는 후커 팬츠를 입는다. 그는 친한 친구이자 손님이기도 한 이기 팝이나 슬래시, 데비 해리 같은 펑크의 전문가들을 사랑하지만 매일 밤 더러운 셔츠를 입고 킬러 쇼 공연을 하러 가는, 슈즈 코너에서 일하는 어린 펑크 소년에게도 비슷한 관심과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지미 웹과 레이 굿맨이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뉴욕 이스트 빌리지는 계속 변할지도 모른다. 지막으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꾸는 꿈은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37년이나 유지된 이 숍에 관해 끈임없이 이야기하게 될 거예요. 바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과 두려움이 없는 정신, 우리가 추구하는 펑크 록을 말이죠.”

EDITOR   K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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