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ne Pernet

블로거이자 비평가인 다이앤 퍼넷은 늘 묘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다. 어떤 때는 어두운 베일 뒤에 가려져 있기도 하고, 짙은 블랙 선글라스 뒤에 숨어 있기도 한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시그너처 이미지를 만들어오며, 현재 통찰력 있는 패션계의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녀는 모바일 폰을 이용해 자신의 블로그 ‘Shaded View on Fashion’에 패션쇼 사진과 글을 올린 첫 번째 사람일 것이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패션에 관한 독특한 관점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뉴욕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나?
남들이 내게 보수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던 짧은 10대 시절이 지나고 나니 온갖 흥미로운 것들이 다 모여 있는 뉴욕에서 살고 싶어졌다. 물론 남들에겐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가 되는 것보다는 큰 연못의 작은 물고기가 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사는 사진가 남자친구를 만났고, 당시 그는 르포 사진을 찍던 나에게 좀 더 분명한 걸 해보라고 권유했다. 이를테면 디자인 같은. 그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 즉시 파슨스 디자인 스쿨과 FIT에 등록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학교를 그만두고 나만의 브랜드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내가 만든 브랜드와 함께 대중 속에서 13년을 살아왔다.

당신이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할 당시 뉴욕은 어땠나?
그 당시 ‘다운타운 디자이너’로 분류되고 싶지 않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다운타운 패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1970년대 뉴욕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특히 클럽 문화가 발달했다. 나는 밤에 활동하는 타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 문화를 무척이나 즐겼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디자이너로서의 본업으로 돌아와 일에 집중하게 됐지만. 파티에 나가서 사람들을 사귀는 것보다는 내가 만든 작품들이 존중을 받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보다는 내가 만든 디자인이 스타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 사랑하던 뉴욕을 떠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1987년부터 뉴욕은 엄청 암울해졌다. 내 주변의 80% 정도가 에이즈를 앓거나 그로 인해 죽어나갔던 것 같다. 코카인의 일종인 크랙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정신병원은 수용하고 있던 환자들을 모두 그들이 원래 살던 거리로 다시 내몰았다. 대규모의 폭력은 물론이고. 더 이상 그곳에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1990년 말, 나는 짐을 싸서 파리로 떠났다. 내 인생과 사업 모두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떠나야만 했다. 

 



당신의 블로그는 소위 말해 마니아를 처음으로 양산했다. 반응은 어땠나?
처음엔 블로그가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라이프 블로깅’이라 불렸던 소프트웨어, 그러니까 지금의 트위터 전신 같은 것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패션쇼장에 앉아서 지금에 비하면 거의 고물에 가까운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즉시 라이프 블로깅에 업로드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마 그 ‘즉시성’에 감탄을 하고 놀랐을 거다.

Shaded View on Fashion 필름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패션 필름이 현대 문화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음, 내가 보기엔 대중은 패션 필름이라는 것이 굉장히 다가가기 힘든 영역이며, 패션을 사랑하고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좋은 패션 필름은 주인공인 패션과 미디어 자체를 초월한다. 스타일만을 강조해 만들어진 짧은 분량의 단편 패션 필름들이라 해서 결코 장편의 패션 필름들에 비해 섬세함이나 중요도가 떨어지진 않는다. 또 그 필름들이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테마를 담을 수 없다거나, 중요한 이슈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됐다고 본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곧 출시될 당신의 자서전에 대해 얘기해달라.
사람들이 나에 대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은 고작 신비롭다는 정도다. 따라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나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늘 사람들에게 내 인생은 열린 책과도 같다고 말해왔으니, 이거야말로 내 말에 책임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나. 당연히 자서전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을 나에 대한 얘기가 들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상상하고 그려왔던 나의 모습도 담겨 있을지 모른다. 

Diane Pernet’s Top Tribes


The Factory
앤디 워홀의 스튜디오인 ‘더 팩토리’의 정규 멤버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워홀과 연관된 사람들과 교류를 해왔다. 홀리 우드론(Holly Woodlawn)은 내 스튜디오에 와서 옷을 사 갔고, 스테판 스프라우즈(Stephen Sprouse)는 지금까지도 쿨하고 편한 친구다. 워홀의 오른팔이었던 벤자민 리우(Benjamin Liu) 또한 내 첫 쇼의 프로듀서를 맡아줬다. 더 팩토리에 있으면 창의적인 생각들이 폭발하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 계속됐다.


The Mudd Club
머드 클럽은 당시 뉴욕에 살면서 1970년대 전설적인 디스코 클럽인 스튜디오 54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 곳이다. 다운타운에서 스튜디오 54의 인기에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와 성향이 맞았다. 머드 클럽뿐만 아니라 앤스테리아, 에어리어, 더 록시, 파라다이스 개러지, 그리고 세이브 더 로봇 같은 곳에 출몰하던 사람들이 그러하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던 것 같다. 다운타운 사람들과 업타운에 끌리는 사람들.


Glam Rock
글램 록은 내 스타일을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글램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자기 표현을 중시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와 그의 화려한 무리들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글램 록에 빠져 있을 당시 나는 필모어 이스트에서 열리는 록 콘서트를 보기 위해 녹색의 반짝이는 립스틱을 바르고, 높은 플랫폼 부츠를 신은 채 뉴욕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했었다. 친구들과 나는 음악에 매혹되어 있었고, 그것이 삶의 법칙인 줄만 알았었다. 

TEXT  이자벨라 버를리(ISABELLA BU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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